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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로 떠난 한국인 간호사들|파독 여성 이주노동의 역사와 오늘의 결혼이민자
낯선 나라에서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로 병원 안내를 받고, 가족에게 편지를 쓰며, 월급의 일부를 고향으로 보내는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오늘날 한국에 사는 결혼이민자와 외국인 근로자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러한 모습은 과거 한국인에게도 있었습니다.
1960∼1970년대 많은 한국인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가 독일 병원에서 일하기 위해 고향과 가족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흔히 파독 간호사라고 부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경제발전에 기여한 근로자의 역사인 동시에,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일하고 가족을 만들며 살아간 한국인 여성 이민자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 사용하는 ‘파독 간호사’는 당시 독일 병원으로 건너간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를 함께 가리키는 역사적 통칭입니다. 개인마다 자격, 근무조건과 이주 과정은 달랐습니다.
파독 간호사는 언제부터 독일로 갔을까요?
한국인 간호인력이 독일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국가 간 공식 협약이 체결되기 전부터였습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1969년 한국해외개발공사와 독일 병원협회가 한국인 간호인력의 독일 취업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기 전에는 민간 차원의 취업이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협약 이후에는 교육, 모집, 독일 병원 취업과 보험 등을 포함한 제도적인 절차가 마련되면서 국가 차원의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습니다. 국가기록원 파독 간호인력 기록 안내
따라서 모든 간호사가 처음부터 정부의 동일한 방식으로 파견됐다고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민간 또는 개인적인 연결을 통한 취업 시작
- 1960년대 중반: 한국인 간호인력의 독일 취업 증가
- 1966년: 정부 차원의 간호인력 파견 진행
- 1969년: 한국해외개발공사와 독일 병원협회 간 협약
- 1970년 전후: 독일로 이동한 간호인력 규모가 크게 증가
- 1970년대 중후반: 대규모 파독 사업이 마무리됨
국가기록원에는 1966년 1월 30일 한국인 간호인력 128명이 김포공항을 통해 독일로 출발하는 모습도 남아 있습니다. 1966년 파독 간호원 출발 기록
몇 명의 한국인이 독일로 떠났을까요?
자료마다 집계기간과 간호조무사 포함 여부가 달라 정확한 숫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재외동포사 자료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약 1만 명의 간호인력이 독일로 이동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국가기록원 일부 자료에서는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를 포함해 약 1만1,000명으로 집계합니다. 독일역사박물관 역시 1977년까지 약 8,000명의 광부와 약 1만 명의 간호사·간호보조인력이 서독에 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정확히 몇 명”이라고 하나의 숫자로 단정하기보다 약 1만 명에서 1만1,000명 규모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재외동포사 자료
독일역사박물관 한국인 노동이주 자료
왜 한국인 간호사들은 독일로 떠났을까요?
한국에는 일자리가 부족했습니다
전쟁 이후 한국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교육을 받고 간호자격을 취득해도 원하는 병원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독일 취업은 더 나은 임금과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선택지였습니다.
독일에는 간호인력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서독은 경제성장과 의료수요 증가에 비해 병원에서 일할 간호인력이 부족했습니다. 독일 병원은 해외에서 간호인력을 모집했고 한국 여성들에게도 취업 기회가 열렸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돕고 싶었습니다
파독 간호사들은 자신의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의 일부를 한국 가족에게 송금했습니다.
그 돈은 부모님의 생활비, 동생 학비, 주택 마련과 가족의 빚을 갚는 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더 넓은 세상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가난 때문에 떠난 것은 아닙니다.
전문직 여성으로서 새로운 의료기술과 언어를 배우고 싶었던 사람, 가족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삶을 살고 싶었던 사람, 유럽에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 싶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주 동기를 희생이나 애국심 한 가지로만 설명하면 여성 개개인의 선택과 꿈을 놓칠 수 있습니다.
독일 병원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요?
한국에서 간호교육을 받았더라도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동일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언어가 다르고 의료체계와 업무방식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격을 인정받는 과정과 병원 배치에 따라 간호보조 업무부터 시작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일부는 다음과 같은 어려운 일을 담당했다고 회고합니다.
- 환자의 식사와 목욕 돕기
- 침상과 병실 정리
- 야간근무
- 거동이 어려운 환자 돌보기
- 임종환자와 사망자에 관한 업무
- 언어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환자와 소통하기
- 한국에서 경험한 간호업무와 다른 노동 수행하기
모든 병원과 모든 간호사의 경험이 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좋은 동료와 관리자를 만난 사람도 있었고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경험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불쌍한 사람’으로만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전문적인 의료노동을 제공하면서 독일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만들어간 여성 노동자였습니다.
언어가 가장 먼저 세운 벽
오늘날에는 번역 앱과 영상통화가 있지만 당시에는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없었습니다.
처음 독일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짧은 기간 동안 배운 독일어로 병원 업무와 생활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독일어는 일상회화와 달랐습니다.
- 환자의 증상과 상태
- 약의 이름과 투약시간
- 의료기구의 명칭
- 의사와 동료의 업무지시
- 보호자의 질문
- 응급상황에 관한 보고
한 단어를 잘못 이해하면 환자의 안전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말이 부족한 상태에서 전문직의 책임까지 감당해야 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부담은 컸을 것입니다.
퇴근 후에도 집을 구하고 은행을 이용하며 우편을 보내고 체류서류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언어는 직장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독일에서 살아가기 위한 생존수단이었습니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와 송금
파독 간호사에게 편지는 한국 가족과 연결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지금처럼 휴대전화로 부모님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월급날에는 독일에서 필요한 생활비를 남기고 한국 가족에게 돈을 보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돈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담겨 있었습니다.
- 동생이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도록 보낸 학비
- 부모님의 병원비
- 가족이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한 저축
- 빚을 갚기 위한 돈
- 고향에 남은 자녀의 양육비
- 귀국 후 새로운 삶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
국가기록원은 파독 광부와 간호인력의 송금이 당시 한국의 외화 확보와 경제성장에 기여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성장을 전적으로 이들의 송금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과장해서도 안 됩니다. 경제발전에는 수출, 산업정책, 해외차관과 노동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습니다.
파독 간호사의 송금은 거대한 경제지표이기 전에 가족을 책임지려 했던 개인의 노동과 희생이었습니다.
외로움과 문화 차이
독일에서의 어려움은 병원 노동만이 아니었습니다.
한국 음식과 가족이 그리웠고, 날씨와 주거문화도 달랐습니다. 한국에서 당연하게 여기던 명절과 가족관계가 독일에서는 이어지기 어려웠습니다.
병원에서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낯선 시선을 받거나 동료와 환자의 편견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한국 사회의 엄격한 가족문화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생활과 개인의 자유를 경험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독일은 고독한 타국이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장소였습니다. 같은 시대에 같은 직업으로 이주했어도 여성마다 경험과 선택은 달랐습니다.
계약이 끝난 뒤의 선택
계약기간이 끝난 후 파독 간호사들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사람
가족과 다시 살거나 한국의 병원에서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 귀국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랜 해외생활 뒤 한국에 돌아왔지만 달라진 가족관계와 사회환경에 다시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독일에 남은 사람
독일 병원에서 계속 일하고 영주자격이나 국적을 취득하면서 독일에 정착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인회, 교회와 지역모임을 만들며 서로의 생활을 도왔습니다.
다른 나라로 이주한 사람
독일에서 얻은 경력과 언어를 바탕으로 미국, 캐나다 등 제3국으로 이동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가족을 만든 사람
독일에서 한국인 광부나 유학생을 만나 결혼한 사람도 있었고 독일인과 결혼해 다문화가정을 이룬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한국과 독일의 언어와 문화를 함께 경험하는 이민 2세가 됐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는 독일에 남은 파독 광부와 간호인력이 현지 한인사회의 중요한 기반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파독 간호사는 이민자였을까요?
처음부터 영구정착을 목적으로 떠나지 않았더라도 해외에서 일하고 생활하며 가족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파독 간호사는 한국 여성 이주노동의 중요한 역사입니다.
이들에게는 오늘날 이민자들이 경험하는 문제가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는 어려움
- 외국 자격과 경력을 인정받는 문제
- 체류기간과 취업자격
- 가족과의 장거리 이별
- 고향으로 보내는 생활비
- 직장 내 차별과 문화 차이
- 귀국과 정착 사이의 선택
- 국제결혼과 이민 2세의 정체성
우리는 한국을 떠난 이들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오늘날 한국에 온 외국인 주민의 마음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파독 간호사와 오늘의 결혼이민자
파독 간호사와 현재 한국에 사는 결혼이민자는 서로 다른 시대와 제도 속에서 이동했습니다.
파독 간호사는 주로 노동과 취업을 위해 독일로 갔고, 결혼이민자는 배우자와 가족을 이루기 위해 한국에 옵니다. 따라서 두 집단을 완전히 같은 경험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낯선 나라에 처음 도착했을 때 겪는 감정에는 닮은 점이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의 경험오늘날 결혼이민자의 경험
| 독일어로 병원업무를 배움 | 한국어로 생활과 취업을 준비함 |
| 독일 병원의 업무방식에 적응 | 한국의 가족·직장문화에 적응 |
| 한국 가족에게 편지와 송금 | 고향 가족과 영상통화·송금 |
| 체류와 취업 문제를 고민 | 비자·체류기간·취업자격을 확인 |
| 한국 음식과 가족을 그리워함 | 고향 음식과 부모·형제를 그리워함 |
| 독일인·한국인과 가족을 형성 | 한국인 배우자와 다문화가정 형성 |
| 자녀의 언어와 정체성을 고민 | 자녀의 이중언어와 정체성을 고민 |
“한국에 왔으니 한국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
과거 독일 사회가 한국인 간호사들에게 “독일에 왔으니 독일 방식에만 맞추라”고 요구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공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인 가족도 결혼이민자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만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이민자는 한국생활을 배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한국인 배우자와 가족도 상대방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 외국인 배우자의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주기
- 고향 가족과 연락하는 시간을 존중하기
- 한국어가 부족하다고 아이처럼 대하지 않기
- 중요한 서류를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받기
- 고향에 보내는 생활비를 부부가 함께 의논하기
- 자녀가 부모 양쪽의 언어를 배울 기회 제공하기
- 외국인 배우자의 학업과 취업을 지원하기
- 가족 갈등을 문화 차이 한 가지로만 설명하지 않기
적응은 한 사람만 변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가족과 지역사회가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이민자의 송금에는 가족의 사연이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가 한국으로 돈을 보낸 것처럼 오늘날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와 결혼이민자도 고향의 부모와 자녀에게 생활비를 보냅니다.
한국인 배우자는 외국인 배우자가 고향에 돈을 보내고 싶어 할 때 “한국 가족보다 친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돈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부모님의 병원비
- 자녀와 동생의 학비
- 고향집 생활비
- 가족의 재난·사고 복구비
- 결혼 전부터 책임져 온 부양비
그렇다고 가정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송금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부는 송금 여부를 감정적으로 판단하기보다 매달 가능한 금액, 횟수와 특별한 상황에서의 지원기준을 함께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파독 간호사의 송금 역사를 기억한다면 오늘날 외국인 배우자의 가족 책임도 조금 더 넓은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성의 이름으로 다시 기억해야 하는 역사
파독 역사는 광부와 간호사의 이야기로 함께 소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성 간호사의 경험은 그 자체로 자세히 기록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해외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경제활동 주체였습니다. 언어를 배우고 전문직 노동을 수행했으며 현지사회에 정착해 한인공동체와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귀국 후에도 간호, 교육, 사회활동과 가족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들을 국가경제에 돈을 보낸 ‘희생적인 여성’으로만 기억하면 개인의 꿈과 전문성, 독립적인 선택이 보이지 않습니다.
파독 간호사의 역사는 다음 세 가지 관점에서 함께 바라봐야 합니다.
-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한 노동의 역사
- 해외에서 전문직을 수행한 여성의 역사
- 언어와 문화를 넘어 정착한 한인 이민의 역사
한 장의 서류에 담긴 파독 간호사의 삶
파독 간호사의 역사도 처음에는 계약서, 여권, 병원 배치서류와 월급명세서 같은 종이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서류에는 한 여성의 긴 여행이 담겨 있었습니다.
- 한국에서 받은 간호교육
- 독일어를 공부한 시간
- 처음 배치된 병원
- 가족에게 보낸 월급
- 체류기간을 연장해야 했던 사정
- 근무지를 변경하고 싶었던 이유
- 결혼과 가족결합
- 귀국하거나 독일에 남기로 한 선택
국가기록원에는 파독 간호인력의 교육, 보험, 병원 취업, 분쟁, 근무지 변경과 가족결합에 관한 문서가 보존돼 있습니다.
서류가 단순한 행정기록이 아니라 이주민 한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역사자료가 된 것입니다.
제가 국제결혼과 외국인 생활 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느낀 것도 같습니다.
한 장의 서류에도 한 사람의 발자취와 한 가정의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파독 간호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한국은 과거 국민을 해외에 보냈던 나라에서 이제는 다양한 국적의 이민자를 맞이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우리의 어머니와 누이들이 독일에서 언어와 문화 차이, 외로움과 차별을 견디며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한국에 온 이민자를 바라보는 태도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에서 한국으로 온 결혼이민자도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며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 위해 고향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동정이 아닙니다.
-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
- 언어를 배울 충분한 시간
- 안전하게 일할 권리
- 가족과 연락하고 문화를 지킬 권리
- 배우자와 동등하게 의논할 권리
-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중받을 권리
파독 간호사의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과거를 칭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 곁의 이민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일로 이어져야 합니다.
마무리
1960∼1970년대 독일로 떠난 한국인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은 낯선 언어와 병원환경 속에서 일했습니다.
일부는 가족에게 돈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일부는 독일이나 제3국에 정착했습니다. 결혼해 가족을 만들고 한인공동체의 기반이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역사는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 돈을 벌러 간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전문직 여성의 해외노동, 가족에 대한 책임, 문화적응, 국제결혼, 이민 2세와 정체성까지 이어지는 한국 이민사의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오늘날 한국에 온 결혼이민자와 외국인 근로자의 어려움을 이해하려면 우리도 과거에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 독일의 한국인 간호사에게 필요했던 따뜻한 말과 공정한 대우가 오늘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에게도 필요합니다.
W 외국인생활도움은 과거 이민자의 역사와 오늘날 다문화가정의 삶을 연결해, 사람과 서류 속에 담긴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참고한 공식·공공자료
- 국가기록원 한국인 파독 간호인력 관련 기록
- 국가기록원 1966년 독일파견 간호원 제1진 출발
- 국사편찬위원회 재외동포사총서 독일 한인사회
- 국가기록원 재외한인의 역사 연표
- 독일역사박물관 한국인 노동이주 자료
안내사항
파독 간호사의 인원과 시기는 자료의 집계범위와 간호조무사 포함 여부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이 글은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와 독일역사박물관 자료를 참고해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역사·생활정보입니다.